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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폐비 윤씨와 양극성 장애
    정신질환 2021. 9. 17. 20:12

    흥미로운 리뷰논문이 있어 공유하고자 합니다. 

    폐비 윤씨와 양극성 장애

    Deposed Queen Yoon Might Have Suffered From Bipolar Disorder

     

    대한신경정신의학회지에 실린 review article(2021)에서 발췌한 일부분입니다. 

     

    본 연구에서는 관련 문헌을 찾아보고 폐비 윤씨에 대한 정신의학적 고찰을 하였다. 정신질환이 있는지, 구체적으로는 양극성 장애에 부합되는지 검토해 보았다.


    폐비 윤씨의 기분 증상을 암시하는 임상양상

    폐비 윤씨가 양극성 장애를 앓았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기록은 「성종실록」의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성종실록」에는 폐비 윤씨가 왕비에 책봉된 지 8개월 만에 왕자를 출산하고 4개월 뒤인 성종 8년(1477년) 3월 29일14)에 윤씨가 경조증이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 있다. “중궁이 숨겼는데, 열어 보았더니 작은 주머니에 비상(砒霜)이 들어 있고, 또 굿하는 방법의 서책이 있었다. (중략) 중궁이 옛날 숙의로 있을 때 일하는 데에 있어서 지나친 행동이 없었으므로 주상이 중하게 여겼고 (중략) 정위에 오르면서부터 일이 잘못됨이 많았다.”라는 기록이다. 왕비 윤씨가 다른 후궁을 질투하여 사람을 독살할 수 있는 비상과 굿하는 방법이 있는 책을 가지고 있다가 발각되었다는 내용이다. 과도한 질투는 경조증에서 비롯된 행동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성종 8년(1477년) 3월 30일15) 대신들과 의논하여 중궁을 폐하여 빈으로 강등시켜 별궁에 거처하게 하였다. 이후 별궁에서 지내게 되지만 성종과 윤씨의 관계가 다시 빠르게 회복되는 것을 보여주는 기록들이 있다. 관계가 다시 좋아졌다는 사실로, 출산 후 생긴 윤씨의 경조증이 호전되었을 가능성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성종 9년(1478년) 1월 1일 16)에 “중궁이 편찮으니 회례연(會禮宴)을 정지하라.”는 기록과 1월 3일17)에는 “중궁이 이미 회복되었으니 (중략) 풍악 1등을 내리라.”, 12월 27일18) “왕비(王妃)의 어머니 신씨(申氏)의 작첩(爵牒)을 돌려주게 하였다.”라는 기록들을 통해 적어도 성종 9년 12월까지는 윤씨가 증상이 호전되어 성종과 적절한 관계를 잘 유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는 증거는 시점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성종 9년 말에서 성종 10년 초 사이 즈음 두 번째 왕자를 출산했다는 사실이다.19)

    둘째 왕자를 출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성종 10년(1479년) 6월부터 조증 증상들을 시사하는 행동들을 「성종실록」의 여러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6월 2일20) 성종이 말한 내용으로, “내간(內間)에는 시첩(侍妾)의 방이 있는데, 일전에 내가 마침 이 방에 갔는데 중궁이 아무 연고도 없이 들어왔으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중략) 뉘우쳐 깨닫기를 바랐는데, 지금까지도 오히려 고치지 아니하고, 혹은 나를 능멸하는 데까지 이르렀다.”라는 기록이 있다. 성종이 후궁과 잠자리를 하고 있는데 윤씨가 침실로 불쑥 들어가는 행동을 한 것이다. 상식적으로 왕이 잠자리를 하고 있는데 참지 못하고 이런 부적절한 행동을 한다는 것은 당시 궁궐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자신의 욕구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부적절한 행동을 한 상태로 조증 증상으로 볼 수 있다.

    조선 후기 이긍익이 쓴 「연려실기술」21)(권6, 성종조 고사본말)은 윤씨의 폐사(廢死)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처음에 원자를 낳아 임금의 사랑이 두터워지자 교만하여 여러 후궁을 투기하고 임금에게도 공손하지 못하였다. 어느 날 임금의 얼굴에 손톱자국이 났으므로 (중략) 윤비를 폐하여 사제로 내치게 하였다.” 또 「연려실기술」에서 「기묘록」을 인용해 윤씨가 성종의 얼굴을 할퀴어 손톱자국을 냈다고 서술했다.10) 과도한 질투, 임금에게 불공손하고 공격적인 행동 등을 보이는 것은 조증 증상을 시사한다.

    「성종실록」 성종 10년(1479년) 6월 5일 기록22)에도 기분 증상으로 인한 것으로 의심되는 부적절한 행동들이 잘 드러나 있다. 기록을 보면 “지난 정유년(성종 8년)에 윤씨(尹氏)가 몰래 독약을 품고 사람을 해치고자 하여 (중략) 항상 나를 볼때, 일찍이 낯빛을 온화하게 하지 않았으며, 혹은 나의 발자취를 찾아서 없애 버리겠다고 말하였다. (중략) ‘허물을 고치기를 기다려 서로 보도록 하겠다.’라고 하였더니, (중략) 이제 도리어 이와 같으므로, 전일의 말은 거짓 속이는 말이었다.”라고 되어 있다. 이러한 지나친 질투와 성종에 대한 무례한 행동들, 순종적이지 않으며 자기 주장이 강한 모습, 예민함 등을 봐서는 조증 혹은 경조증 증상일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또 같은 기록 뒷부분에는 “상참(常參; 임금에게 정사를 아뢰던 일)으로 조회를 받는 날에는 비(妃)가 나보다 먼저 일찍 일어나야 마땅할 것인데도, 조회를 받고 안으로 돌아온 뒤에 일어나니”라고 되어 있다. 아침에 임금이 정사를 보러 나가는데도 일어나지 않고 다녀온 후에야 일어나는 행동은 양극성 장애의 우울 증상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양극성 우울증은 무기력하고 수면이 늘어나 아침에 일어나기 힘든 것과 같은 비전형적 우울증의 양상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23)

    「성종실록」에서 대왕대비(정희왕후)가 같은 날(성종 10년 6월 5일) 한글로 쓴 언문의 내용22)에도 윤씨의 문제되는 행동들이 잘 드러나 있다. 그 기록은 “중궁은 전날에 거의 주상을 준봉(遵奉)하지 아니하였고, (중략) 주상이 때로 편치 않을 때가 있어도 마음에 개의치 않고 꽃 핀 뜰에서 놀고 새를 잡아 희롱하다가도, (중략) 경멸하여 주상으로 하여금 안심하고 음식을 들 때가 없게 하였고, (중략) 그 악(惡)이 날로 커져서 꺼리는 바가 없었으나, (중략) 허물을 고치게 하려고 한 것이 한가지 일만이 아니었다. 우리들이 비록 부덕하더라도 옛 현비(賢妃)의 일을 인용하여 가르치기를 곡진하게 하였어도 일찍이 들으려고 생각지 아니하였다. (중략). 지난 해에는 중궁이 주상을 용렬한 무리라고까지 하였고, 또 그 자취도 아울러 깎고자 하므로”라고 표현되어 있다.

    여기서 한 나라의 왕인 성종을 전혀 존중하지 않고 오히려 저주하고 위협하는 윤씨의 모습이 드러난다. 게다가 대비들이 잘못을 고치도록 가르침을 줘도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런 모습들은 조증 혹은 경조증으로 자존감이 고양되어 주저하는 바 없이 자기주장이 강해지고 비판적 태도를 보이는 행동으로 볼 수 있다.

    이어서 같은 날 “무릇 불의(不義)한 일을 행했을 때에 우리들이 보고 물으면 대답하기를, ‘주상이 가르친 것입니다.’하고, 주상이 이를 보고 꾸짖으면, ‘대비(大妃)가 가르친 것입니다.’라고 하여, 그 거짓된 짓을 행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24)라는 기록과 성종 10년(1479년) 윤10월 22일25)에는 “윤씨(尹氏)가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오래 살아서 보기를 원하는 일이 있다.’고 했으니 (중략) ‘대왕대비의 친족으로 하여금 죽지 않고 남는 사람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도 윤씨가 잘못한 행동을 대비들이 꾸중해도 성종과 대비 탓을 하며, 대비들을 위협하는 말까지 하는데, 이 역시 평소와 달리 자신을 과대 평가하고 감정 조절을 못하는 조증 증상으로 인해 후궁으로 간택되었을 때의 겸손하고 예의 바른 모습과는 상반된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성종실록」 13년(1482년) 8월 11일26) 기록에는 성종과 대비들을 향한 윤씨의 저주와 위협이 심해지고, 공격적인 행동과 자극 과민성을 보이는 조증 증상을 시사한 기록이 있다. “윤씨가 나에게 곤욕을 준 일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심지어는 나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발자취까지도 없애 버리겠다.’고 하였다. (중략) 또한 윤씨는 내가 거처하는 곳의 장막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소장(素帳; 장사 지낼 때 쓰는 흰 휘장)이다.’라고 하였으니, 그의 부도(不道)함이 이런 유(類)인데 목숨을 보전한 것만도 다행이다.”

    같은 날(성종 13년 8월 11일) 대비전에서 보낸 기록27)에도 윤씨의 조증을 시사하는 부적절한 행동과 말이 잘 드러난다. “우리들이 바른말로 책망을 하면, 저는 손으로 턱을 고이고 성난 눈으로 노려보니, 우리들이 명색은 어버이인데도 이러하였다. 그런데 하물며 주상에게는 패역(悖逆)한 말까지 많이 하였으니, 심지어는 주상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발자취 까지도 없애 버리겠다.’고 하고, 또 스스로 ‘상복을 입는다.’ 하면서 여름철에도 표의(表衣)를 벗고 항상 흰 옷을 입었다. 그리고 늘 말하기를, ‘내가 오래 살게 되면 후일에 볼만한 일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라는 기록이다.

     


    폐비 윤씨의 가족력을 보면, 아들인 연산군도 양극성 장애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결론

    본 연구에서는 「성종실록」과 관련 문헌으로 확인한 임상 양상과 가족력을 통해 폐비 윤씨가 양극성 장애를 앓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울증 및 조증에 부합하는 증상 삽화가 간헐적으로 나타났고, 분만 후 발병한 점과 아들 연산군의 양극성 장애 발병 가능성으로 볼 때 폐비 윤씨가 양극성 장애를 앓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폐비가 된 이유는 양극성 장애 발병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J Korean Neuropsychiatr Assoc. 2021 Aug;60(3):159-166. Korean.
    Published online Aug 31, 2021.  https://doi.org/10.4306/jknpa.2021.60.3.159
    Copyright © 2021 Korean Neuropsychiatric Associ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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